내가 조용필을 좋아하는 이유

생각하기 2011. 5. 8. 00:54
아주 오래전 일이다. 고등학교 다닐때 우리 학교 방송반에서 점심시간에 음악방송을 했었는데 때마침 대마초 사건을 털고 '창밖의 여자'로 화려하게 재데뷔한 조용필의 노래가 주 레파토리였다. 도시락을 먹으며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내가 가수 조용필을 좋아하게 된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달리 사춘기적 감성을 털어낼 곳 없었던 내게 조용필의 노래는 겉치장 다 벗어 버리고 속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조용필의 광팬이 되었다. 그의 앨범, 화보집, 신문기사 모두 모으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TV에 나올때마다 사진을 찍어 조용필 사진첩을 만들기도 했고, 조용필에게 편지형식으로 일기를 쓴 메모장도 한권을 채울 정도였다.

사춘기 시절엔 누구나 연예인 한번씩 폭풍처럼 좋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조용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은 벌써 30년을 넘어서 계속되고 있다. 조용필이 도선사에서 몰래 결혼을 했다는 기사를 신문 한귀퉁이에서 보거나, 음주운전으로 타고가던 벤츠 자동차가 뒤집힐 정도였다는 얘기를 들어도, 가십거리 스캔들이 있을 때도, 한번도 그에 대해 실망하거나, 팬으로서의 마음을 접은 적이 없었다. 사실, 두번째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워싱턴에서 장례를 치르며 비탄에 빠져있는 조용필의 모습을 TV로 보았을땐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까지 했다.

광팬이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공연도 여러차례 보았다. 오늘(날짜로는 어제)도 올림필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조용필 콘서트 - 바람의 노래를 보고 왔다. 참 오랫만이었다. 2008년 LA 공연 이후 처음이다. 조용필 자신도 한 일년 가까이 콘서트를 쉬다가 처음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조용필 공연의 매력은 주름지고, 머리 새고 얼굴에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아줌마들을 '소녀'로 변신시킨다는 점에 있다. 형광봉을 흔들고, 일어서서 펄쩍펄쩍 뛰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물론 나도 그랬다. 이번에는 손등에 판박이까지!


무대는 조용필 답게 웅장했고, 신선했다. 워낙 공연장이 크기 때문에 무대를 움직여 조금이라도 팬들의 곁에서 노래 부르려 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그는 활력이 넘쳤고, 감동적이었다. 이번에도 오빠를 외치며 노래를 따라부르다 목이 다 쉬었다.

내가 이토록 열광적으로 조용필을 좋아하는 이유는, 물론 그의 노래가 너무 좋고, 내가 일상 생활에서 지치고 힘들때 힘도 되어 주고, 미소짓게 해주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가 온전히 자신이 잘하는 일에 빠져 나이 들도록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또 그것으로부터 위안받고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좋다. 존경스럽고 닮고 싶다.  

오늘 공연에서, 첫인사로 조용필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한해 잠실 공연 이후 근 일년을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쉬었는데, 그냥 그래보고 싶어서 그렇게 했는데, 너무 좋았던 시절도 잠시, 도대체 노래밖에는 할줄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정말 따분했고, 무대가 그리웠다"고. 누구나 그렇듯이 굴곡있는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너무나 성실하게 하고 있는 그는 '위대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비단 노래 뿐 아니라 그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나는 팬으로서 뿐아니라 인생의 후배로서 위안을 얻고 용기를 얻는다.

고등학교때부터, 삼십년간의 소원이었으나, 불행히도 나는 한번도 조용필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만약 오늘, 내가 그를 만났다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같다. "무대에 있는 당신과 대화하고, 노래를 함께 부르고, 당신의 노래에 취해 있었던 두어시간 동안, 정말 행복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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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Favicon of http://heysukim114.tistory.com/ BlogIcon 저녁노을 2011.05.08 05:58 ADDR 수정/삭제 답글

    여고시절...용필옵빠한테 빠져 살았지요.ㅎㅎㅎㅎ

    잘 보고가요

    • Favicon of https://easysun.tistory.com BlogIcon easysun 2011.05.08 11:59 신고 수정/삭제

      와~! 저녁노을님, 반갑습니다!! 저도 저녁노을님 블로그 보면서 공감할 때가 많이 있지요^^

  • Favicon of http://midorisweb.com BlogIcon 미도리 2011.05.10 22:16 ADDR 수정/삭제 답글

    저는 조용필의 팬은 아니지만, 지선님이 조용필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크게 공감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 계속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도 멋지고, 존경스러워요~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11.05.12 10:27 수정/삭제

      '위대한 인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