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고 줄이는 것의 미학

생각하기 2011. 5. 10. 14:36
와인은 좋아하지만 '신의 물방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그 만화가 많은 사람에게 와인에 대한 동경을 가져다 주었지만 너무나 과한 현학적인 표현들이 또 많은 사람에게 와인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몇가지가 있다. 토미네 잇세가 제 2사도 대결을 벌이면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고행을 떠나는 장면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결핍'으로 인해 오히려 와인에 대한 갈구가 극에 달했고, 때문에 와인 한방울 한방울이 주는 미묘한 맛을 모두 감지해 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어머니 세대들 처럼 '보리고개'를 겪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절약을 교육받으며 부족함에 익숙하게 자라서 인지, 어떤 땐 요즘의 차고 넘치는 물질적 풍요가 오히려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무디게 만드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어찌하다 보니 취미로 시작한 사진 때문에 걷는것을 싫어하는 내가 빛을 쫓아 새벽에도 일어나고 먼길도 마다 않고 무거운 카메라 가방 메고 '출사'다니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의 찬란한 풍광을 제대로 담고 싶어 크게 무리해 좋은 카메라도 장만했다. 물론 아직, 그 카메라의 가능성을 내 조잡한 기술로 제대로 표현을 못하는게 늘 아쉽기는 하다. 

올 봄에는, 유난히 세상을 환하게 하는 꽃의 화려한 색깔과 나뭇잎의 연녹색이 신기하고 감탄스러웠는데, 아마 그것도 모두 내가 사진을 찍기 때문이려니 생각됐다. 사진 찍는데 빠지다 보면 걷고 있을때도 운전을 할 때도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카메라의 구도로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앞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수줍은 미소나 파안 대소하는 밝은 얼굴을 보아도 카메라로 찍어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어느날 흑백에 마음을 빼앗겼다. 너무 많은 색과 나무와 건물과, 모두다 아름다운 그것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는 아직 초보인 내게 오히려 색을 빼고 나니 원래 내가 느꼈던 그 느낌이 더 잘 전달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렇다고 흑백 사진이 더 찍기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론 색으로보다는 색을 빼고, 정보를 줄였을때 상상을 늘려서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말 아침 인천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저멀리 인천항도 보이고 삼삼오오 구경나온 사람들이 훤히 보이는, 평화로우나 (아직 겨울이어서) 풍요롭지는 않은 그 풍경을 어찌 담을까를 고민해는데 오히려 흑백에 답이 있었다.

아직 봄을 느끼기에는 쌀쌀한 초봄, 그러나 햇살만은 따사로워 테라스, 저 나무의자 앉아 졸고 싶었다. 그렇게 어렴풋이 봄을 느끼고 싶었다. 물론 업무 미팅차 찾았던 회사였으므로, 그리고 실제 날씨는 더욱 추웠으므로, 봄날의 노근함은 사진 속에만 담아둘 뿐이었다.

사전 계획없이 무작정 찾은 거제도. 바람의 언덕에서 풍차를 만날 즈음엔 어스름 해가 지고 있어 너무 추웠다. '바람의 언덕'에 걸맞게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그래도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 나도 행복했으니까.

벚꽃피는 윤중로. 1년에 한번 마음껏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벚꽃의 하얀 자태는 과연 아름다웠고, 그 길을 다정히 걷는 사람들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슴 설레게 하는 하얀색이 없어도 우리는 마음 속으로 느낀다. 저 환한 자태를.

나이가 들수록, 색이 배제되어도 빛의 느낌 만으로, 사물의 구도 만으로, 나머지는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게, 늙어가면서 덤으로 생기는 인생의 지혜가 아닐런지... 흑백사진 몇장 놓고 너무 멀리 갔다 싶다. 오늘 날씨가 그런 것같다. 왠지 감성적으로 방황하게 되는 그런 날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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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Favicon of http://puwazaza.com BlogIcon 뿌와쨔쨔 2011.05.10 14:47 ADDR 수정/삭제 답글

    멋진 사진들 잘 감상하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easysun.tistory.com BlogIcon easysun 2011.05.10 14:49 신고 수정/삭제

      헉! 프로님께 이런 말씀을 들으니 몸둘바를... 몰겠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