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증후군과 귀담아 듣기

맛보기 2008. 3. 31. 21:12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대표이사의 타이틀을 갖게된 나는 한동안 'CEO증후군'에 시달린 적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CEO증후군이라는 증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한때 괴롭혔던 그 증상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언제부턴가 회사의 대표자를 '사장'으로 부르는 대신 'CEO'라는 용어가 등장을 했다.  90년대 후반 미국으로부터 건너온 "벤처" 열풍의 한 단면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Chief Executive Office, 최고 경영자라는 이 표현은, 기업을 대표해서 전면에 나서 모든 것을 챙기는 "대표"의 의미에 무언가 모를 '플러스 알파'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CEO와 함께 갑자기 인기를 모았던 단어 가운데는 '비전(Vision)'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굳이 해석하자면 '기업이 앞으로 나아갈 미래 사업 방향'이라고 할수 있을, 실체도 보이지 않는, 이 비전에 대해 사람들은 훨씬 중점을 두었다. 지금 그 기업이 매출이 얼마고 순익이 얼마인가 보다, '비전'이 있는가 없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90년대 후반에는 CEO의 직무를 정의해 보자면, 하루 하루 영업 실적을 챙기는 역할 보다도 오히려 앞으로의 기업이 가진 전망, 즉 비전을 만들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소위 Visionary를 원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애플 컴퓨터의 "스티브 잡스"처럼 비저너리로서의 CEO 브랜드가 인기를 모으면서 모두들 사장에게 CEO가 되기를, Visionary가 되기를 은연중에 강요했다. 아니, 강요했다기 보다 그 당시 나는 그런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과연 나는 회사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회사가 개척해야할 미래를 정확히 짚어 내어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설파"하고 납득시키고, 이해시키고, 나아가 감동시키고, 이끌어갈 수 있는 재목이 되는지 말이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 우리 회사의 비전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도 명확치 않은 그 비전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할 수 있는지.

그것이 내가 고민했던 'CEO 증후군'의 실체였던 것같다. 그 안개속을 헤매는 듯한 불안정함이 싫어서 '늦깍이 유학'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창업3.0에 접어들어 나는 세번째 CEO라는 타이틀의 명함을 가지게 되었는데 사업이 잘되건 못되건 간에 지금은 예전에 가졌던 CEO 증후군의 증상들이 한결 누그러들었다. 어쩌면 CEO의 역할의 기대치가 달라진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CEO란 단어 자체가 예전처럼 그렇게 팬시하지도 않고, 역할에 있어서도 비저너리로서의 역할 보다는 오히려 '리더쉽'에 더 초점을 많이 맞춘듯하다.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는 비정상적으로(?) 똑똑한 경영자이기 보다는 사람들을 잘 이끌고 화합해서 기업의 목표를 명확히 정의하고 차근히 이뤄내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얼마전 오래 알고 지내던 투자사의 CEO를 만났다. 그 분은 "요즘 하는 일의 절반 이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새삼 수긍이 되었다. 조직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 혹은 고객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것이 정말로 CEO가 해야하는 기본적인 임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세상은 갈수록 분화 되면서 폭넓은 시각을 요구한다. 누구 한사람의 혜안을 가진 비저너리가 풀어내기에는 너무나 변수가 많다. 많은 사람의 시각, 의견을 종합한 성실하고 지혜로운 '판단과 결정'이 더욱 중요한 것같다.  

그래서 나는 요즘 더욱 "귀담아 듣기"에 열중한다. 시기 적절한 판단과 결정,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나의 몫이겠지만, 나는 더 이상 백리 앞을 보기 위해 짧은 목을 잔뜩 빼지 않아도 된다. 또 멋들어진 '비전' 대신, 신중한 예측과 선택 가능한 몇가지 행보들을 함께 나누면 된다. 무엇보다도 '뭐든지 다 알고, 똑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도 된다.
 
그 대신, 함께 나아가는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일을 함께 하면 된다. 겉이 번지르한 그럴듯한 '비전'은 종종 신기루 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가슴에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대 기업의 '비전'을 정의하고 공유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조직원들의 현실과 인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야 하지, 미사여구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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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담아 듣기"가 중요하다. -사진출처: www.coran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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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Favicon of http://diarix.tistory.com BlogIcon 그리스인마틴 2008.04.01 01:22 ADDR 수정/삭제 답글

    CEO가 /씨~ 이거, 오래할수 있을까/ 의 약자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네요.
    너무 많은 것을 들으려하면 정작 내게 필요한 영역의 소리를 놓치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모든 동물에게는 고유한 가청영역과 가시영역이 있는것이고요.
    그러나 많이 듣는다는건 언제나 말할때보다 덕이 되는건 분명하더군요.

    날씨가 화사한 하루였는데 잘 지내셨죠?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08.04.01 10:13 수정/삭제

      예.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듣는 것'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그리스인마틴님도 잘 지내시죠? 가끔씩 우주, 혹은 외계 여행도 떠나시나요? ㅎㅎ

  •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BlogIcon 짠이아빠 2008.04.01 09:01 ADDR 수정/삭제 답글

    전 아직 철부지 초보 CEO로 그런 저런 고민들은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진의 거대한 귀는 참 인상적입니다.. ^^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08.04.01 10:17 수정/삭제

      잘하고 계시잖아요..^^
      원래 귀가 크면.. 관상학적으로도 좋다는거 아닌가요.. 잘 모르지만! :-)

  • Favicon of http://www.milgarian.com BlogIcon 밀가루 2008.04.01 12:13 ADDR 수정/삭제 답글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경지로 가는것도 회사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바탕으로 할때 다른이들의 고민과 이야기가 들리는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다른이들의 시각과 판단이 혼란으로만 다가오더라구요..
    다시한번 고민해 보게 되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08.04.01 13:39 수정/삭제

      그런 측면이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inthenet.tistory.com BlogIcon SuJae 2008.04.02 11:53 ADDR 수정/삭제 답글

    두어번 망해보니까 CEO라는 말만 나와도 화들짝 놀랍니다!!
    그래서 요즘은 망해도 혼자 망하려고 혼자 해먹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덧) 티셔츠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조만간 인증샷과 함께 isanghee님께 전달식을 한 후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날이 풀려서 반팔을 입어도 좋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08.04.02 12:45 수정/삭제

      잘 받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뉴욕 거리를 활보해 주세요! ㅋㅋ

  • Favicon of http://jpod.tistory.com BlogIcon j 2008.04.02 18:35 ADDR 수정/삭제 답글

    이 포스트의 이야기도 귀담아 듣게 되네요!
    -.-3(나름 귀모양 이모티콘이라고 우기는...^^*)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08.04.03 11:58 수정/삭제

      귀 모양 맞는 거 같아요. 인정!

  • 2008.04.02 23:54 ADDR 수정/삭제 답글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08.04.03 12:46 수정/삭제

      예. 전화 드리께요 ^^

  • Favicon of https://digitalfish.tistory.com BlogIcon DOKS promotion 2008.04.03 17:17 신고 ADDR 수정/삭제 답글

    CEO, 요즘 받아본 명함에는 CEO 가너무많은듯 합니다. 옥탑방이 주거 및 사무실이여도 CEO 란말을 사용하는데, 아이돌가수에게 뮤지션이라는 칭호를 하지않듯, 보통 회사의 사장들에게 CEO 란 말은 맞지않는 아빠옷을 입힌 느낌입니다. ( 개인적주저리 ^^ )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증후군 탈피하시길 !!

    • Favicon of https://easysun.tistory.com BlogIcon easysun 2008.04.03 17:33 신고 수정/삭제

      ㅎㅎ 흔해진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오히려 흔해서 부담도 적은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acando.kr/ BlogIcon 격물치지 2008.04.04 20:51 ADDR 수정/삭제 답글

    이렇게 고민하는 CEO가 있는 회사의 직원들은 참 행복할 겁니다. ^^

    • Favicon of http://www.sunblogged.com BlogIcon easysun 2008.04.05 10:17 수정/삭제

      ㅎㅎ 그리 말씀해주시니 부끄럽네요^^ 감사합니다.